여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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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이었다. 해발 53m의 야트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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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reo
작성일25-06-18 10:26 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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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이었다. 해발 53m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던 서울 구의동 유적의 발굴 현장 설명회가 열리고 있었다.이 발굴은 학술조사가 아니었다. 강 건너는 잠실지구, 강 이쪽은 화양지구 개발이 이뤄지면서 한강 본·지류를 정비하고, 택지 등을 조성하기 위한 실시된 구제발굴이었다. 약 3000평에 이르는 구릉은 벌써 절해고도로 변해 있었다. 주변은 개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이 구릉을 깎아내야 거기서 얻은 흙을 택지개발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평지로 변한 이 주변 또한 아파트 단지로 조성할 수 있었다.하지만 예부터 ‘말무덤’ ‘장군총’ 등으로 구전되었던 구릉을 그냥 뭉갤 수는 없는 일이었다.1977년 발굴된 서울 구의동 보루에서는 온돌 아궁이 속에 솥과 주전자가 걸려있는 그대로 확인됐다. 이곳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이 551년 백제군의 기습공격에 손 쓸 틈도 없이 전멸된 상황으로 해석됐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 제공■‘빈전이야 빈전!’현장설명회에서 당시 김원룡 발굴단장(서울대 교수)이 ‘한말씀’ 던졌다.“이 구릉은 빈전(殯殿·장례까지 왕·왕비의 관을 모신 전각)…가운데 관을 넣고 가옥을 세운 뒤 출입문을 단 영혼의 생가입니다.”그는 “백제가 3년상을 치른다”는 <주서> 등 중국 역사서의 기사를 근거로 댔다.“이 구의동 유구는 3년상이 끝나자 불사른 임시 가묘이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것”이라는게 김교수의 결론이었다.고구려 보루가 확인된 서울 구의동 구릉(해발 53m). 이미 주변은 화양지구 개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이뤄지면서 구릉은 절해고도가 되었다. 예부터 말무덤, 장군총, 태봉 등으로 구전되던 구릉에 대한 구제발굴이 시작되었다.|구의동 유적 조사보고서선입견을 가질만 했다. 구릉이 예부터 무덤으로 구전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령왕릉(1971년 발굴)에서도 “왕과 왕비의 3년상을 치렀다”고 쓴 지석이 출토된 바 있다. 또 유구의 중심부에 관곽을 넣은 것 같은 구덩이가 보였고, 무덤의 호석으로 여길만한 석축이 둘러쌓여 있었다. 유구는 무덤의 봉토처럼 보였다. 철제 무기류와 농공기구, 가락바퀴, 도기류 등의 출토품도 고분의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일부 현장 조사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 고분이 맞을까. 구릉의 정상부라면 오히려 군1977년 7월이었다. 해발 53m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던 서울 구의동 유적의 발굴 현장 설명회가 열리고 있었다.이 발굴은 학술조사가 아니었다. 강 건너는 잠실지구, 강 이쪽은 화양지구 개발이 이뤄지면서 한강 본·지류를 정비하고, 택지 등을 조성하기 위한 실시된 구제발굴이었다. 약 3000평에 이르는 구릉은 벌써 절해고도로 변해 있었다. 주변은 개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이 구릉을 깎아내야 거기서 얻은 흙을 택지개발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평지로 변한 이 주변 또한 아파트 단지로 조성할 수 있었다.하지만 예부터 ‘말무덤’ ‘장군총’ 등으로 구전되었던 구릉을 그냥 뭉갤 수는 없는 일이었다.1977년 발굴된 서울 구의동 보루에서는 온돌 아궁이 속에 솥과 주전자가 걸려있는 그대로 확인됐다. 이곳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이 551년 백제군의 기습공격에 손 쓸 틈도 없이 전멸된 상황으로 해석됐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 제공■‘빈전이야 빈전!’현장설명회에서 당시 김원룡 발굴단장(서울대 교수)이 ‘한말씀’ 던졌다.“이 구릉은 빈전(殯殿·장례까지 왕·왕비의 관을 모신 전각)…가운데 관을 넣고 가옥을 세운 뒤 출입문을 단 영혼의 생가입니다.”그는 “백제가 3년상을 치른다”는 <주서> 등 중국 역사서의 기사를 근거로 댔다.“이 구의동 유구는 3년상이 끝나자 불사른 임시 가묘이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것”이라는게 김교수의 결론이었다.고구려 보루가 확인된 서울 구의동 구릉(해발 53m). 이미 주변은 화양지구 개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이뤄지면서 구릉은 절해고도가 되었다. 예부터 말무덤, 장군총, 태봉 등으로 구전되던 구릉에 대한 구제발굴이 시작되었다.|구의동 유적 조사보고서선입견을 가질만 했다. 구릉이 예부터 무덤으로 구전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령왕릉(1971년 발굴)에서도 “왕과 왕비의 3년상을 치렀다”고 쓴 지석이 출토된 바 있다. 또 유구의 중심부에 관곽을 넣은 것 같은 구덩이가 보였고, 무덤의 호석으로 여길만한 석축이 둘러쌓여 있었다. 유구는 무덤의 봉토처럼 보였다. 철제 무기류와 농공기구, 가락바퀴, 도기류 등의 출토품도 고분의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일부 현장 조사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 고분이 맞을까. 구릉의 정상부라면 오히려 군사요새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화살촉을 포함, 출토된 3000여점의 철제 무기가 그 증거 아닐까. 또 원형 구덩이 속에 조성된 온돌 시설은 사람이 상주했다는 의미가 아닐까.그러나 현장 조사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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