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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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애(앞줄 가운데) 목사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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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nion
작성일25-04-07 05:46 조회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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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애(앞줄 가운데) 목사가 1950년대 광주여고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강 목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오른쪽 아래에 ‘우연한 기회’라고 적혀 있다. 강 목사 제공 전쟁이 발발한 후 우리 가족은 광주 광산구 비아동으로 피난했다. 비아동은 광주 도심에서 직선거리로 약 10㎞ 떨어진 외곽 지역으로 걸어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이곳은 아버지 친구의 고향이자 집성촌이었다.우리는 사랑채를 빌려 머물렀다. 피난 생활 중에도 보리밥은 먹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비교적 편안하게 지냈다.내 곁에는 오래도록 마음을 나눈 여섯 명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7공주’라 불렸는데 광주 시장의 딸, 철공소 사장의 딸, 소방서 서장의 딸, 무역업을 하는 집안의 딸 등 하나같이 광주에서 이름난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이들 중엔 훗날 교사노조 위원장이 된 친구도, 대통령 영부인을 시누이로 두게 된 이도 있었다.우리 ‘7공주’는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1954년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국문학과로 입학했지만, 같은 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사촌 언니의 영향을 받아 정치외교학과로 전과했다. 당시 정치외교학과의 학생 수는 대략 29명으로 기억된다.제3대 국회의원 선거(1954년 5월 20일) 직후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이화여대 총장은 김활란, 부총장은 박마리아였던 시기다. 당시 이화여대는 각종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며 이화여대 마크가 새겨진 한복을 단체로 입혔다. 한복은 부총장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때도 나는 남색 비로드로 만든 한복을 입었는데 김 총장이 내 한복을 보곤 “사치스럽다”며 타박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재학 시절 내 관심을 가장 끌었던 장소는 대강당 옆 오이밭에서 펼쳐지던 정치 토론장이었다. 이곳에선 학생들이 모여 자유롭게 정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오이밭 토론에 참여했던 이들 가운데서 법관이나 정치인들이 나왔다. 나는 선배들 어깨너머에 조용히 앉아 귀동냥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같이 그 자리를 찾아가 구경하고 듣는 사이 나도 모르게 정무적인 감각이 길러졌다. 당시엔 그저 듣고 배우는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현지시간 9일로 예정된 미국의 무역 상대국에 대한 상호관세 부과를 연기하거나 유예할 가능성이 없다고 밝혔습니다.러트닉 장관은 현지시간 6일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을 위해 상호관세 부과 시행을 연기하는 것을 고려하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습니다.러트닉 장관은 "모두가 흑자를 보고 우리는 적자를 보는 글로벌 무역에 대한 재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이러한 언급은 미국이 상호관세 부과일 전에 일부 국가와의 협상을 통해 해당 국가에 상호관세 부과 시행을 연기하거나 유예할 가능성을 일축한 것으로 풀이됩니다.오주현기자#미국 #관세 #시행 #상무장관연합뉴스TV 기사문의 및 제보 : 카톡/라인 jebo23오주현(viva5@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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